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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출신이 대장군에 임명되고, 결국에는 한(漢)나라를 세운 공으로 초나라 왕까지 오른 한신. 그러나 개국 9개월 만에 한신은 반란을 꾀한다는 죄로 삼족이 멸해지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특히 유방에게 포박당하며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당하자 사냥이 끝난 개는 삶아 먹힌다는 토사구팽의 고사를 언급하며 유방을 원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한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은 한신 본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한신은 직업이 없어 밥을 빌어먹다 쫓겨나기 일쑤였고, 백정 한 명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는 말에 허리를 굽히기도 합니다. 조롱거리 신세였던 한신을 삼군 총사령관인 대장군에 임명한 사람이 바로 유방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시점에서 드러나는 한신의 이기적인 판단과 모반이 결국은 주군인 유방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신이 유방에게 제나라의 왕을 요청한 일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기원전 203년, 한신은 3만의 적은 군사로 시작하여 위, 대, 조, 제, 연 5개의 나라를 물리치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한편, 주군인 유방은 여전히 초나라 항우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유방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신을 가왕으로 삼아 주시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유방은 항우에게 완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시점에서 왕을 시켜달라는 한신의 행동에 큰 화를 내게 됩니다. 나는 이리도 어려워 도움만 바라는 상황인데,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한신은 도와주지도 않고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유방은 한신의 사자에게 화를 내며 쫓아내려는 상황에서 옆에 있던 장량이 유방을 밟으며 귓속말을 합니다.
“한은 지금 불리하오니 어찌 한신이 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왕으로 세우고 잘 대우해 스스로 제를 지키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유방 또한 항우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장량의 말에 깨닫고 다시 한신의 사자에게 말합니다.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진짜 왕이 되어야 한다며 곧바로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합니다. 그러면서 유방은 한신에게 군대를 징발하여 초나라를 치도록 동원 시킵니다. 즉, 유방은 한신의 태도에 대해 상당한 실망을 느꼈으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한신이 배신을 하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로 잠시 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평민 출신에서 결국 제나라의 왕까지 등극하는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방의 입장에서는 항우와 대적하는 상황에서 본인의 군사를 보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얻게 된 뒤에야 군사를 보낸 한신을 기회주의자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후 한나라와 초나라는 휴전 협정을 맺고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에 따라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의 제안으로 한신, 팽월과 함께 기습 공격을 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고릉 전투에서 오기로 되어있던 한신과 팽월은 오지 않았고, 홀로 유방의 군대는 항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유방은 다시 한 번 한신과 거래를 하였고, 그제서야 한신은 부대를 이끌고 달려옵니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서 본인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될 때마다 한신은 거래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뤄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이후 초왕 한신이 모반했다는 소식이 떠돕니다. 이에 유방은 장수들에게 의견을 묻자, ‘서둘러 군대를 내서 한신을 파묻어야 한다‘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한신이 어떠한 입지와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신은 초왕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결국에는 유방의 의심을 사 삼족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 고조가 인정한 개국 공신 초한삼걸(初漢三傑)로서 함께 거론되는 장량과 소하는 모든 공을 유방에게 돌리고 천수를 누립니다. 그러나 왜 한신은 다른 결말을 맞았을까요?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수나라의 유학자 왕통은 멈춤의 지혜를 담은 ‘지학(止學)’을 하나의 학문으로써 설파했습니다. 큰 지혜는 멈춤을 알고, 적은 지혜는 꾀하기만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살펴봅니다.
"군자는 먼저 가리고 나서 사귀고, 소인은 우선 사귄 뒤에 택한다. 그래서 군자는 허물이 적고, 소인은 원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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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출신이 대장군에 임명되고, 결국에는 한(漢)나라를 세운 공으로 초나라 왕까지 오른 한신. 그러나 개국 9개월 만에 한신은 반란을 꾀한다는 죄로 삼족이 멸해지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특히 유방에게 포박당하며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당하자 사냥이 끝난 개는 삶아 먹힌다는 토사구팽의 고사를 언급하며 유방을 원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한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은 한신 본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한신은 직업이 없어 밥을 빌어먹다 쫓겨나기 일쑤였고, 백정 한 명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는 말에 허리를 굽히기도 합니다. 조롱거리 신세였던 한신을 삼군 총사령관인 대장군에 임명한 사람이 바로 유방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시점에서 드러나는 한신의 이기적인 판단과 모반이 결국은 주군인 유방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신이 유방에게 제나라의 왕을 요청한 일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기원전 203년, 한신은 3만의 적은 군사로 시작하여 위, 대, 조, 제, 연 5개의 나라를 물리치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한편, 주군인 유방은 여전히 초나라 항우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유방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신을 가왕으로 삼아 주시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유방은 항우에게 완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시점에서 왕을 시켜달라는 한신의 행동에 큰 화를 내게 됩니다. 나는 이리도 어려워 도움만 바라는 상황인데,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한신은 도와주지도 않고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유방은 한신의 사자에게 화를 내며 쫓아내려는 상황에서 옆에 있던 장량이 유방을 밟으며 귓속말을 합니다.
“한은 지금 불리하오니 어찌 한신이 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왕으로 세우고 잘 대우해 스스로 제를 지키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유방 또한 항우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장량의 말에 깨닫고 다시 한신의 사자에게 말합니다.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진짜 왕이 되어야 한다며 곧바로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합니다. 그러면서 유방은 한신에게 군대를 징발하여 초나라를 치도록 동원 시킵니다. 즉, 유방은 한신의 태도에 대해 상당한 실망을 느꼈으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한신이 배신을 하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로 잠시 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평민 출신에서 결국 제나라의 왕까지 등극하는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방의 입장에서는 항우와 대적하는 상황에서 본인의 군사를 보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얻게 된 뒤에야 군사를 보낸 한신을 기회주의자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후 한나라와 초나라는 휴전 협정을 맺고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에 따라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의 제안으로 한신, 팽월과 함께 기습 공격을 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고릉 전투에서 오기로 되어있던 한신과 팽월은 오지 않았고, 홀로 유방의 군대는 항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유방은 다시 한 번 한신과 거래를 하였고, 그제서야 한신은 부대를 이끌고 달려옵니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서 본인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될 때마다 한신은 거래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뤄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이후 초왕 한신이 모반했다는 소식이 떠돕니다. 이에 유방은 장수들에게 의견을 묻자, ‘서둘러 군대를 내서 한신을 파묻어야 한다‘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한신이 어떠한 입지와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신은 초왕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결국에는 유방의 의심을 사 삼족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 고조가 인정한 개국 공신 초한삼걸(初漢三傑)로서 함께 거론되는 장량과 소하는 모든 공을 유방에게 돌리고 천수를 누립니다. 그러나 왜 한신은 다른 결말을 맞았을까요?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수나라의 유학자 왕통은 멈춤의 지혜를 담은 ‘지학(止學)’을 하나의 학문으로써 설파했습니다. 큰 지혜는 멈춤을 알고, 적은 지혜는 꾀하기만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살펴봅니다.
"군자는 먼저 가리고 나서 사귀고, 소인은 우선 사귄 뒤에 택한다. 그래서 군자는 허물이 적고, 소인은 원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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