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tem has been added to your cart.
Should I order it along with the items in my shopping cart?
2023년 우리나라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슈는 단연 저출산입니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보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저출산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실제 우리 2030 남녀들이 연애하고 결혼을 고민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서오남’ (서울대 오십대 남성) 인구학자가 각종 통계를 늘어놓으며 인구 피라미드를 논하고, 여성학자는 일·가정 양립에 대해 뻔하디 뻔한 코멘트를 하고, 방송에서 MZ세대는 이전세대보다 더 가난한 첫 세대가 되었습니다, 청년 일자리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도출됩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를 낳는 당사자인 지금의 청년여성들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묻지 않습니다. 또 저출산이 마치 오롯이 여성의 탓인 것처럼 요즘 여성들은 모성애가 없다는 식의 몰아가기나, 이 모든 것이 페미니즘과 이에 물든 요즘 여성들 탓이라는 식의 극단적 시각도 의외로 사회에 만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는 모두 본질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은 남녀간 감정의 결합입니다. 저출산 문제를 인구통계적으로, 경제학적 시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지금 대한민국 2030세대 남녀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감정적인 역동(dynamic), 그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과 출산은 피상적인 숫자나 통계로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동해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작금의 사회문화적 역동을 ‘화가 난 남자, 마음의 문을 닫은 여자’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젠더갈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단어 안에는, 이대남의 분노가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오면 20대 중후반이 되고, 취업시장은 녹록지 않고 집값은 비현실적으로 높습니다. 이대남들이 느끼고 있는 경제적 불안감을 이준석 전 대표는 잘 포착했고, 여기에 남성들의 기회를 여자들이 부당하게 뺏고 있다는 남녀 대결 논리, 역차별론이라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이대남들의 무력감을 여성들의 탓으로 돌려 현실 도피와 공격성 표출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에 조금이라도 반문하거나 남녀간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남성은 ‘스윗남’, 여성은 ‘페미’, ‘개딸’이라는 낙인을 찍어 눌러버렸습니다. 모든 여성이 ‘페미’나 ‘개딸’은 아닙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여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페미’ 세계관에서는, 대화의 창구가 없고 여성들에 대한 공격성만이 남습니다. 연애 상대인 같은 세대 여성들에게는 젊은 남성들의 바로 이 점이 가장 두드러져 보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서 따스함과 안정을 원합니다. 여자에게 공격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남성과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은 여성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대선 때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이대남’ 현상에서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 여성들은 이렇게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동 나이대 남성들에게 일종의 절망감을 느꼈고,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남성을 만나지 않고, 결혼은 애초에 하고 싶지 않으니 여성들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여성들이 만나주지 않으니 성적인 욕구불만이 쌓인 남성들은 ‘더’ 화가 납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최근 사회 면을 도배하는 잦은 데이트폭력, 성폭력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젊은 여성들은 암묵적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범사회적 맥락은 결코 여성들의 피해망상이라고 치부하거나 특정 범죄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축소시킬 일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지금 젊은 남성들은 굉장히 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남녀를 떠나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힘듭니다. 요즘은 여성들도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성들도 휴식처가 되어줄 배려심 있고 대화가 통하는 동반자를 원하지, 여러모로 감정적으로 날 서 있는 남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자면, 저출산의 첫 번째 핵심은 이 이대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청년여성들로서는 남녀간 감정적 균열이 임계점을 넘어 원활하게 감정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운 수준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왜 이렇게(?) 이대남들이 화난지 모르는 듯합니다. 여가부 폐지만 하면 되는 것이냐 갸우뚱하며 맥락을 전혀 짚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육아지원금, 돌봄 등은 엄밀히 말하면 결혼하고 난 이후의 2차적인 문제입니다. 집값도 물론 큰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여성들이 하는 말은 그 모든 것에 앞서 감정적인 교류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젊은 여성들은 이미 일찍이 성평등으로 살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여성들이 오롯이 육아의 짐을 다 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괴리는 기업 문화의 개선과 남성들의 협조로 줄어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변화가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이가 10살 정도 되기까지는 여자의 희생으로 가정이 지탱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남성들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그 사이, 여자들의 커리어는 육아에 치여 한풀 꺾여버려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이 평균적으로 고학력이 되면서, ‘아내’, ‘엄마’로서 희생하는 삶만이 아닌 ‘나’의 커리어 지속도 중요해졌습니다. 출산으로 인해 받게 되는 사회적 불이익이 없어야 진정한 성평등 사회입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이렇게 비협조적인 이 이대남들이 결혼 후에 육아에 협조적으로 나올까요? 지금의 한국 청년여성들은 단호하게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 고생길이 훤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은 여자는 없습니다. 그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입니다. 말 그대로 ‘출산 파업’인 것입니다.
비혼과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떠한 피상적인 통계나 숫자보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 괜한 구색 맞추기식 통계나 참고문헌이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인용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짜 청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밀리언달러 퀘스천(million dollar question, 백만불짜리 질문)입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최근 들어 심각해진 청년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공격성, 이것이 사회적으로 남녀간 소통과 결혼율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사회 전체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당연히 경제가 나아지고 일자리가 생겨 사회적 여건이 나아지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이는 지금 문제의 시급성을 이해하지 못한 너무 한가하고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단기적으로 청년남성들의 분노를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는 창구, 또 세대 전체적으로 남녀가 원활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도와주는 어떠한 사회적 창구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합니다. 2022년은 여러 선거로 인해 정치적으로 이대남들의 분노가 이용되며 강하게 대변되었던 ‘이대남의 해’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전부 ‘개딸’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듯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2023년에는 합리적인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도 대등하게 정치권에서 제대로 대변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페미, 반페미’로 대표되는 남녀 대결 구도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사회적인 남녀간 감정적 균열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저출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사회문화적 노력, 즉 같은 세대 남녀간 허심탄회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대남, 이대녀 둘 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진솔한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합니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더더욱 두려워하지 말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논란이 생길 것이 두려워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미래는 ‘조용히’ 어두워질 것입니다.
🔎위 텍스트를 누르면 해당 에디터의 프로필을 볼 수 있어요!
2023년 우리나라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슈는 단연 저출산입니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보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저출산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실제 우리 2030 남녀들이 연애하고 결혼을 고민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서오남’ (서울대 오십대 남성) 인구학자가 각종 통계를 늘어놓으며 인구 피라미드를 논하고, 여성학자는 일·가정 양립에 대해 뻔하디 뻔한 코멘트를 하고, 방송에서 MZ세대는 이전세대보다 더 가난한 첫 세대가 되었습니다, 청년 일자리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도출됩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를 낳는 당사자인 지금의 청년여성들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묻지 않습니다. 또 저출산이 마치 오롯이 여성의 탓인 것처럼 요즘 여성들은 모성애가 없다는 식의 몰아가기나, 이 모든 것이 페미니즘과 이에 물든 요즘 여성들 탓이라는 식의 극단적 시각도 의외로 사회에 만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는 모두 본질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은 남녀간 감정의 결합입니다. 저출산 문제를 인구통계적으로, 경제학적 시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지금 대한민국 2030세대 남녀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감정적인 역동(dynamic), 그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과 출산은 피상적인 숫자나 통계로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동해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작금의 사회문화적 역동을 ‘화가 난 남자, 마음의 문을 닫은 여자’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젠더갈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단어 안에는, 이대남의 분노가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오면 20대 중후반이 되고, 취업시장은 녹록지 않고 집값은 비현실적으로 높습니다. 이대남들이 느끼고 있는 경제적 불안감을 이준석 전 대표는 잘 포착했고, 여기에 남성들의 기회를 여자들이 부당하게 뺏고 있다는 남녀 대결 논리, 역차별론이라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이대남들의 무력감을 여성들의 탓으로 돌려 현실 도피와 공격성 표출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에 조금이라도 반문하거나 남녀간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남성은 ‘스윗남’, 여성은 ‘페미’, ‘개딸’이라는 낙인을 찍어 눌러버렸습니다. 모든 여성이 ‘페미’나 ‘개딸’은 아닙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여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페미’ 세계관에서는, 대화의 창구가 없고 여성들에 대한 공격성만이 남습니다. 연애 상대인 같은 세대 여성들에게는 젊은 남성들의 바로 이 점이 가장 두드러져 보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서 따스함과 안정을 원합니다. 여자에게 공격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남성과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은 여성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대선 때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이대남’ 현상에서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 여성들은 이렇게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동 나이대 남성들에게 일종의 절망감을 느꼈고,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남성을 만나지 않고, 결혼은 애초에 하고 싶지 않으니 여성들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여성들이 만나주지 않으니 성적인 욕구불만이 쌓인 남성들은 ‘더’ 화가 납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최근 사회 면을 도배하는 잦은 데이트폭력, 성폭력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젊은 여성들은 암묵적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범사회적 맥락은 결코 여성들의 피해망상이라고 치부하거나 특정 범죄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축소시킬 일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지금 젊은 남성들은 굉장히 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남녀를 떠나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힘듭니다. 요즘은 여성들도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성들도 휴식처가 되어줄 배려심 있고 대화가 통하는 동반자를 원하지, 여러모로 감정적으로 날 서 있는 남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자면, 저출산의 첫 번째 핵심은 이 이대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청년여성들로서는 남녀간 감정적 균열이 임계점을 넘어 원활하게 감정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운 수준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왜 이렇게(?) 이대남들이 화난지 모르는 듯합니다. 여가부 폐지만 하면 되는 것이냐 갸우뚱하며 맥락을 전혀 짚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육아지원금, 돌봄 등은 엄밀히 말하면 결혼하고 난 이후의 2차적인 문제입니다. 집값도 물론 큰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여성들이 하는 말은 그 모든 것에 앞서 감정적인 교류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젊은 여성들은 이미 일찍이 성평등으로 살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여성들이 오롯이 육아의 짐을 다 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괴리는 기업 문화의 개선과 남성들의 협조로 줄어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변화가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이가 10살 정도 되기까지는 여자의 희생으로 가정이 지탱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남성들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그 사이, 여자들의 커리어는 육아에 치여 한풀 꺾여버려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이 평균적으로 고학력이 되면서, ‘아내’, ‘엄마’로서 희생하는 삶만이 아닌 ‘나’의 커리어 지속도 중요해졌습니다. 출산으로 인해 받게 되는 사회적 불이익이 없어야 진정한 성평등 사회입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이렇게 비협조적인 이 이대남들이 결혼 후에 육아에 협조적으로 나올까요? 지금의 한국 청년여성들은 단호하게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 고생길이 훤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은 여자는 없습니다. 그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입니다. 말 그대로 ‘출산 파업’인 것입니다.
비혼과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떠한 피상적인 통계나 숫자보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 괜한 구색 맞추기식 통계나 참고문헌이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인용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짜 청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밀리언달러 퀘스천(million dollar question, 백만불짜리 질문)입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최근 들어 심각해진 청년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공격성, 이것이 사회적으로 남녀간 소통과 결혼율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사회 전체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당연히 경제가 나아지고 일자리가 생겨 사회적 여건이 나아지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이는 지금 문제의 시급성을 이해하지 못한 너무 한가하고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단기적으로 청년남성들의 분노를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는 창구, 또 세대 전체적으로 남녀가 원활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도와주는 어떠한 사회적 창구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합니다. 2022년은 여러 선거로 인해 정치적으로 이대남들의 분노가 이용되며 강하게 대변되었던 ‘이대남의 해’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전부 ‘개딸’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듯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2023년에는 합리적인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도 대등하게 정치권에서 제대로 대변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페미, 반페미’로 대표되는 남녀 대결 구도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사회적인 남녀간 감정적 균열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저출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사회문화적 노력, 즉 같은 세대 남녀간 허심탄회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대남, 이대녀 둘 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진솔한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합니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더더욱 두려워하지 말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논란이 생길 것이 두려워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미래는 ‘조용히’ 어두워질 것입니다.
🔎위 텍스트를 누르면 해당 에디터의 프로필을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