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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하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놓고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때에 우연히 정경심 교수의 페이스북(Facebook)을 방문한 적이 있다. 페친 가운데 한 분이 정교수를 격려하며 공유한 링크를 따라 정교수의 페이스북에 들어간 순간, 그동안 막연히 품었던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언론의 줄기찬 폭로와 세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조국 장관과 그 가족의 뚝심이었다. 고등학생 딸의 의학논문 제1저자 등재나 석연치 않은 사모펀드 의혹 등 웬만한 사람이면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일만한 상황인데도 당당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들이 검찰에서 조사받고 귀가한 날 정경심 교수가 올린 글에는 ‘좋아요’ 1만개를 비롯해 1만8천개의 뜨거운 반응과 3,8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은 하나같이 정경심 교수와 조국 장관을 격려하거나 검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 댓글마다 또 ‘좋아요’가 붙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의 억울함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미안해하랴.
21세기 디지털사회에서 이제 사람들은 각자가 메아리 반향실 즉 ‘에코 챔버’(echo chamber) 속에 살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소통이 보편화된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유유상종의 소통’을 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 나를 불쾌하게 하는 정보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굳이 대화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또 그럴 시간도 없다. 자연히 소셜미디어에서는 정치 성향이나 생각이 유사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된다. 유튜버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 맘에 드는 기사나 동영상을 발견하면 즉시 소셜미디어 친구들과 공유한다. 친구들이 올리는 기사나 동영상에 나도 ‘좋아요’를 누르며 눈길을 준다. 21세기 디지털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 생각과 같은 정보는 선호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일찍이 1940년대에 저명한 사회학자 폴 라자스펠드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매스미디어의 효과를 분석하며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이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국민의 선택’(The People’s Choice)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유성향과 일치하는 정보에 선택적으로 노출하기 때문에 기존의 정치적 태도가 강화되는 효과는 있어도 지지후보를 바꾸는 그런 극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선택적 노출’ 현상은 나중에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이론’에 의해 깔끔하게 설명되었다. 즉, 자신의 정치성향에 맞지 않은 정보는 심리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에 회피하고 성향에 맞는 정보를 선택함으로써 생각과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선택적 노출은 또한 기존의 태도를 확증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선택적 노출, 인지부조화이론, 확증편향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선유성향이나 기존의 인지체계와 일치하는 정보는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회피하는 경향성을 설명한다.
인터넷이라는 폐쇄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기존의 신념은 강화되고 증폭된다. 게다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이용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알고리즘에 기반한 이용자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의 기능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더욱 입맛에 맞는 정보에만 노출되고 에코 챔버 효과에 의해 기존의 신념과 태도가 강화되고 증폭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이다. 집단 극화는 구성원들의 신념과 태도가 소통 과정을 거치며 특정 방향으로 더욱 강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의 수많은 토론방에서 집단 극화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집합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양극화로 인한 진영 대결로 나타난다.
집단 극화와 그로 인한 죽기 살기 식의 진영 대결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도날드 트럼프의 미국이 그렇고 보리스 존슨의 영국이 그렇다. 확증편향의 ‘끝판 왕’이라 할 만한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 부르고 비판 기사를 서슴없이 ‘가짜(fake)’로 규정한다. 지난 10월 말에는 그가 ‘가짜신문’으로 명명한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의 구독을 백악관이 취소하는 발표도 나왔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의 유력 신문 구독을 취소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비판 언론과의 대립과 심지어 하원에서의 탄핵절차 진행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는 크게 훼손되지 않고 있다. 잘 나가는 경제 덕분이 크겠지만, 미국 유권자를 관통하는 정치 양극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정치 양극화와 진영 논리에 의한 적대 정치라면 대한민국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난 가을 온 나라를 흔들었던 ‘조국 사태’는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진영 논리에 갇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상식과 윤리의 판단 기준 조차 진영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에 ‘내로남불’ 내지는 ‘조로남불’은 이제 한국정치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되었다. 내가 하든 남이 하든 불륜은 불륜이라는 동일한 가치 척도를 공유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동일한 기준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은 가히 민주주의의 위기라 부를 만하다. 인터넷이 처음 출현했을 때는 인터넷이 정보에 대한 접근과 시민의 정치참여를 용이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나만의 벽을 쌓은 사람들이 점점 에코 챔버에 갇혀 집단 극화가 심화되고 이로 인해 진영 논리의 적대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2019년 9월 하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놓고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때에 우연히 정경심 교수의 페이스북(Facebook)을 방문한 적이 있다. 페친 가운데 한 분이 정교수를 격려하며 공유한 링크를 따라 정교수의 페이스북에 들어간 순간, 그동안 막연히 품었던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언론의 줄기찬 폭로와 세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조국 장관과 그 가족의 뚝심이었다. 고등학생 딸의 의학논문 제1저자 등재나 석연치 않은 사모펀드 의혹 등 웬만한 사람이면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일만한 상황인데도 당당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들이 검찰에서 조사받고 귀가한 날 정경심 교수가 올린 글에는 ‘좋아요’ 1만개를 비롯해 1만8천개의 뜨거운 반응과 3,8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은 하나같이 정경심 교수와 조국 장관을 격려하거나 검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 댓글마다 또 ‘좋아요’가 붙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의 억울함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미안해하랴.
21세기 디지털사회에서 이제 사람들은 각자가 메아리 반향실 즉 ‘에코 챔버’(echo chamber) 속에 살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소통이 보편화된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유유상종의 소통’을 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 나를 불쾌하게 하는 정보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굳이 대화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또 그럴 시간도 없다. 자연히 소셜미디어에서는 정치 성향이나 생각이 유사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된다. 유튜버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 맘에 드는 기사나 동영상을 발견하면 즉시 소셜미디어 친구들과 공유한다. 친구들이 올리는 기사나 동영상에 나도 ‘좋아요’를 누르며 눈길을 준다. 21세기 디지털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 생각과 같은 정보는 선호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일찍이 1940년대에 저명한 사회학자 폴 라자스펠드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매스미디어의 효과를 분석하며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이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국민의 선택’(The People’s Choice)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유성향과 일치하는 정보에 선택적으로 노출하기 때문에 기존의 정치적 태도가 강화되는 효과는 있어도 지지후보를 바꾸는 그런 극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선택적 노출’ 현상은 나중에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이론’에 의해 깔끔하게 설명되었다. 즉, 자신의 정치성향에 맞지 않은 정보는 심리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에 회피하고 성향에 맞는 정보를 선택함으로써 생각과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선택적 노출은 또한 기존의 태도를 확증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선택적 노출, 인지부조화이론, 확증편향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선유성향이나 기존의 인지체계와 일치하는 정보는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회피하는 경향성을 설명한다.
인터넷이라는 폐쇄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기존의 신념은 강화되고 증폭된다. 게다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이용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알고리즘에 기반한 이용자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의 기능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더욱 입맛에 맞는 정보에만 노출되고 에코 챔버 효과에 의해 기존의 신념과 태도가 강화되고 증폭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이다. 집단 극화는 구성원들의 신념과 태도가 소통 과정을 거치며 특정 방향으로 더욱 강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의 수많은 토론방에서 집단 극화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집합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양극화로 인한 진영 대결로 나타난다.
집단 극화와 그로 인한 죽기 살기 식의 진영 대결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도날드 트럼프의 미국이 그렇고 보리스 존슨의 영국이 그렇다. 확증편향의 ‘끝판 왕’이라 할 만한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 부르고 비판 기사를 서슴없이 ‘가짜(fake)’로 규정한다. 지난 10월 말에는 그가 ‘가짜신문’으로 명명한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의 구독을 백악관이 취소하는 발표도 나왔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의 유력 신문 구독을 취소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비판 언론과의 대립과 심지어 하원에서의 탄핵절차 진행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는 크게 훼손되지 않고 있다. 잘 나가는 경제 덕분이 크겠지만, 미국 유권자를 관통하는 정치 양극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정치 양극화와 진영 논리에 의한 적대 정치라면 대한민국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난 가을 온 나라를 흔들었던 ‘조국 사태’는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진영 논리에 갇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상식과 윤리의 판단 기준 조차 진영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에 ‘내로남불’ 내지는 ‘조로남불’은 이제 한국정치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되었다. 내가 하든 남이 하든 불륜은 불륜이라는 동일한 가치 척도를 공유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동일한 기준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은 가히 민주주의의 위기라 부를 만하다. 인터넷이 처음 출현했을 때는 인터넷이 정보에 대한 접근과 시민의 정치참여를 용이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나만의 벽을 쌓은 사람들이 점점 에코 챔버에 갇혀 집단 극화가 심화되고 이로 인해 진영 논리의 적대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