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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던 tvN 사극 '철인왕후'는 최종화가 17.4%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철인왕후'가 몸살을 앓았던 건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자국 역사 폄하논란이다.
첫회에서 철인왕후가 『조선왕조실록』을 '지라시'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문제가 됐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의 허세스러운 남성 요리사의 영혼이 조선 철종 대 철인왕후에게 빙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뤘다. 따라서 '지라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맥락상 어색하진 않았지만 자국 역사를 폄하했다는 비판을 마주하게 됐다. 이것을 '왜곡'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겠지만 제작진의 의도치 않은 실책 정도다.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강렬한 한국 사회와 언론은 이 문제를 크게 다뤘지만 실은 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자의적 사관에 따른 왜곡이다.
이 드라마에서 철종은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개혁적 정치를 펼치려는 의욕적인 군주로 등장한다. 간혹 33세에 요절한 철종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상상을 펼치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데서 따른 것이다.
흔히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진 철종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강화도로 간 것은 14세 때다. 다만 형 이명이 역모에 휘말려 죽는 바람에 5년간 평민처럼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헌종이 요절하는 바람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그는 의지할 친왕세력을 만들 틈이 없었다. 안동 김씨라는 처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왕권을 세우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 철종이 안동 김씨를 배제하고 국정을 다스리려 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조선 후기 왕권이 그나마 강했다고 하는 숙종이나 영조도 서인이든 풍산홍씨든 왕권을 받쳐줄 당파나 외척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렇다면 '철인왕후'는 왜 철종을 내세워 이렇게 무리한 구도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다보니 벌어진 결과다. 조선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는 대부분 개혁을 꿈꾸는 군주와 이를 방해하려는 기득권 신료 세력의 대립으로 짜여진다. 대부분의 사극이 세종, 광해군, 정조 시대를 다루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같은 공식이 가장 극대화 된 것은 세종 시대다.
한석규-최민식이 출연한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서 장영실의 활약상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세종과 신료들 간에 벌어진 갈등이다.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구 간의(簡儀)가 갈등의 축이다. 세종은 조선만의 독자적 천문과 시간을 갖겠다며 간의 제작을 추진하지만 “명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는 10년전 나온 영화 ‘신기전’과 판박이 수준이다. ‘신기전’에서 세종은 명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고민하면서 다연장로켓포 ‘신기전’의 개발을 추진하는데 여기서도 국내 신료들의 반발과 명나라의 방해가 난관으로 등장한다.
조선의 자주성을 위해 고뇌하는 군주 세종이 무언가를 만들기로 하고, 명나라와 사대주의로 똘똘 뭉친 신료들이 한 편이 되어 이를 막는 것이 세종 시대를 다루는 사극의 법칙이다.
실제 역사는 달랐다.
“좌헌납 윤사윤이 아뢰기를 ‘이미 이룩된 간의대(簡儀臺)를 헐어 버리고 급하지 않은 이궁(離宮)을 지으심은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미비한 신의 말씀을 굽어 용서하셔서 우선 이 공사를 정지하시기를 비옵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획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고칠 수 없다’…” (『세종실록』 25년 1월 23일)
간의대는 천문기구 간의가 설치된 곳이다. 대화를 보면 세종이 간의대를 헐어버리라고 지시했고, 윤사윤이 반대한 것이다. 세종이 간의대를 헐기로 한 것은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간의대가 있는 자리에 이궁(離宮)을 짓기 위해서였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이유다. 도리어 신하들이 반발했다.
사대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조선시대 누구보다 사대에 정성을 다했다. 심지어 사대가 너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내가 사대의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말한다는데, 지금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상을 주고 하는 예우가 일찍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로서 해마다 직공의 예를 닦아, 때에 따라 조빙하면 명나라가 이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하였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크게 불경한 일이고, 특히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느냐”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사극이 역사를 정반대로 뒤집은 셈이다. 그러면 다시 질문이다. 사극은 왜 이런 구도를 만들까. 크게 두 가지가 작용한다고 본다.
첫째. 집권 세력에 우호적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국왕과 기득권을 지키려 대항하는 신료(특히 노론)의 구도는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다. 정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이 대개 이런 식인데 노무현 정부 때 MBC에선 '이산'을 제작하기도 했다.
둘째. 초인관이다.
민주공화정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대중들은 토론과 합의를 통한 국정운영보다 초인적 존재가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여전하다. 그래서 대통령은 대선때마다 GDP 성장률이나 일자리 숫자 등을 터무니없이 부풀려 말하면서 모든 걸 해결할 듯이 말한다. 사극도 국왕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고, 적폐인 신료 세력이 이를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책임을 돌리는 서사가 가장 잘 먹힐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가 발달한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선 사극을 만들 때 여러 명의 작가들이 투입되고, 전문가들의 고증도 철저한 편이다. NHK의 대하드라마는 역사의 서브 교재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점차 나아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1명의 작가가 집필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자료 수집이나 고증도 철저하지 못하고 개인의 역사-정치관이 강하게 개입되곤 한다.
사극은 그 사회의 성숙도와도 연관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K-드라마의 열풍에 취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던 tvN 사극 '철인왕후'는 최종화가 17.4%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철인왕후'가 몸살을 앓았던 건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자국 역사 폄하논란이다.
첫회에서 철인왕후가 『조선왕조실록』을 '지라시'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문제가 됐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의 허세스러운 남성 요리사의 영혼이 조선 철종 대 철인왕후에게 빙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뤘다. 따라서 '지라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맥락상 어색하진 않았지만 자국 역사를 폄하했다는 비판을 마주하게 됐다. 이것을 '왜곡'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겠지만 제작진의 의도치 않은 실책 정도다.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강렬한 한국 사회와 언론은 이 문제를 크게 다뤘지만 실은 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자의적 사관에 따른 왜곡이다.
이 드라마에서 철종은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개혁적 정치를 펼치려는 의욕적인 군주로 등장한다. 간혹 33세에 요절한 철종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상상을 펼치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데서 따른 것이다.
흔히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진 철종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강화도로 간 것은 14세 때다. 다만 형 이명이 역모에 휘말려 죽는 바람에 5년간 평민처럼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헌종이 요절하는 바람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그는 의지할 친왕세력을 만들 틈이 없었다. 안동 김씨라는 처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왕권을 세우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 철종이 안동 김씨를 배제하고 국정을 다스리려 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조선 후기 왕권이 그나마 강했다고 하는 숙종이나 영조도 서인이든 풍산홍씨든 왕권을 받쳐줄 당파나 외척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렇다면 '철인왕후'는 왜 철종을 내세워 이렇게 무리한 구도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다보니 벌어진 결과다. 조선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는 대부분 개혁을 꿈꾸는 군주와 이를 방해하려는 기득권 신료 세력의 대립으로 짜여진다. 대부분의 사극이 세종, 광해군, 정조 시대를 다루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같은 공식이 가장 극대화 된 것은 세종 시대다.
한석규-최민식이 출연한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서 장영실의 활약상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세종과 신료들 간에 벌어진 갈등이다.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구 간의(簡儀)가 갈등의 축이다. 세종은 조선만의 독자적 천문과 시간을 갖겠다며 간의 제작을 추진하지만 “명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는 10년전 나온 영화 ‘신기전’과 판박이 수준이다. ‘신기전’에서 세종은 명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고민하면서 다연장로켓포 ‘신기전’의 개발을 추진하는데 여기서도 국내 신료들의 반발과 명나라의 방해가 난관으로 등장한다.
조선의 자주성을 위해 고뇌하는 군주 세종이 무언가를 만들기로 하고, 명나라와 사대주의로 똘똘 뭉친 신료들이 한 편이 되어 이를 막는 것이 세종 시대를 다루는 사극의 법칙이다.
실제 역사는 달랐다.
“좌헌납 윤사윤이 아뢰기를 ‘이미 이룩된 간의대(簡儀臺)를 헐어 버리고 급하지 않은 이궁(離宮)을 지으심은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미비한 신의 말씀을 굽어 용서하셔서 우선 이 공사를 정지하시기를 비옵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획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고칠 수 없다’…” (『세종실록』 25년 1월 23일)
간의대는 천문기구 간의가 설치된 곳이다. 대화를 보면 세종이 간의대를 헐어버리라고 지시했고, 윤사윤이 반대한 것이다. 세종이 간의대를 헐기로 한 것은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간의대가 있는 자리에 이궁(離宮)을 짓기 위해서였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이유다. 도리어 신하들이 반발했다.
사대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조선시대 누구보다 사대에 정성을 다했다. 심지어 사대가 너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내가 사대의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말한다는데, 지금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상을 주고 하는 예우가 일찍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로서 해마다 직공의 예를 닦아, 때에 따라 조빙하면 명나라가 이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하였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크게 불경한 일이고, 특히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느냐”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사극이 역사를 정반대로 뒤집은 셈이다. 그러면 다시 질문이다. 사극은 왜 이런 구도를 만들까. 크게 두 가지가 작용한다고 본다.
첫째. 집권 세력에 우호적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국왕과 기득권을 지키려 대항하는 신료(특히 노론)의 구도는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다. 정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이 대개 이런 식인데 노무현 정부 때 MBC에선 '이산'을 제작하기도 했다.
둘째. 초인관이다.
민주공화정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대중들은 토론과 합의를 통한 국정운영보다 초인적 존재가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여전하다. 그래서 대통령은 대선때마다 GDP 성장률이나 일자리 숫자 등을 터무니없이 부풀려 말하면서 모든 걸 해결할 듯이 말한다. 사극도 국왕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고, 적폐인 신료 세력이 이를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책임을 돌리는 서사가 가장 잘 먹힐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가 발달한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선 사극을 만들 때 여러 명의 작가들이 투입되고, 전문가들의 고증도 철저한 편이다. NHK의 대하드라마는 역사의 서브 교재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점차 나아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1명의 작가가 집필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자료 수집이나 고증도 철저하지 못하고 개인의 역사-정치관이 강하게 개입되곤 한다.
사극은 그 사회의 성숙도와도 연관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K-드라마의 열풍에 취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