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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조선일보 문화부장 출신이며
현재 논어등반학교 교장으로 논어 읽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오늘, 과거 태종과 세종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미래 모델을 구상해 본다.
미래 기획이란 진공眞空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향후 10년을 기획하려면 적어도 과거 10년을 정확히 진단해야 하고 향후 30년을 기획하려면 과거 30년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지식사회에서 미래 기획, 혹은 미래 진단의 담론이 사라졌다. 그저 그때그때 터져 나오는 이슈들에 대한 땜질식 처방을 놓고서 갑론을박을 벌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인상에 남는 미래 기획을 들자면 비록 국가 주도이기는 해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큼 넓고 깊은 영향을 남기며 현실 속에 구현된 기획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1968년 창립돼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한국미래학회의 활약이다. 대체로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라는 큰 흐름을 읽고서 연구와 저술 그리고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미래 기획이 있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0년대 들어 과거와 같은 어젠다 설정과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학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이 앓고 있는 미래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라 할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미래 지향을 잃은 과거 탐색은 자칫 맹목적이고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빠진 미래 지향은 공허하다. 미래와 과거가 지속적으로 상호 대화를 나눌 때라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살아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종과 세종의 미래 기획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리 말해 두자면 태종은 미래를 먼저 구상하고서 현재를 만들어간 유형이라면 세종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표준을 확보한 다음에 현재를 새롭게 해간 유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유형을 종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할 숙제를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태종의 경우다. 태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육조 직계제로 바꿨다. 한 마디로 재상 중심의 정치에서 국왕 중심의 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흔히 태종의 권력투쟁의 승리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표피적 관찰이다. 의정부 서사제 하에서도 태종은 충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기 개인의 정치권력만 생각했다면 이런 혁신을 굳이 위험부담을 안아가며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고려말 혼란했던 정치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강력한 왕권 중심 제도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후대를 위해 왕권 강화를 골자로 하는 육조직 계제를 관철시켰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것은 세종이다.
이처럼 미래를 먼저 구상하고서 현재를 만들어간 태종의 두 번째 결단은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을 임금으로 올린 일이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세자교체란 상당한 권력균열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황희가 양녕편에 섰다고 정치적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백성과 종묘사직의 미래를 우선시했고 그에 입각해 충녕대군을 택현擇賢하는 대결단을 내렸다. 실제로 그로 인해 세종의 태평성대가 찾아왔다.
물론 이런 미래 기획은 특출난 임금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또 그에 따른 위험성이 크다. 사실 처남들인 민씨 형제들의 죽음은 바로 이런 미래 기획의 변화와도 밀접했다. 즉 태종은 양녕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양녕과 밀접했던 외삼촌들인 민씨 형제들을 제거한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정작 양녕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민씨 형제들의 죽음은 매우 억울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충녕을 왕위에 올리고서 그의 처가 집안인 심씨 집안을 초토화시킨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미래에서 출발하는 기획은 이처럼 현재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성찰에 기반한 미래 기획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세종의 경우다.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태종과 달리 현장 경험이 없었다. 선량한 성품과 호학好學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일이 생길 때마다 세종은 “옛일을 상고하라”고 했다. 즉 예전의 비슷한 케이스들을 모아 비교 검토한 뒤에 해법을 찾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사안을 개별적으로 푸는데 만족하기보다는 늘 근본적인 해법을 추구하는 국왕이었다. 그것은 곧 과거의 표준으로 돌아가 근원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한글 창제가 그 전형이다.
세종 10년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여느 임금 같으면 그냥 강상綱常을 어긴 죄라 해 사형을 시키라고 명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달랐다. 일단 그 사건의 ‘근원적인’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자신이 정치를 잘 못해서 백성들의 풍속이 교화되지 않아 이런 사건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이에 풍속교화를 위해 ‘삼강행실’을 교육시키고 또 ‘삼강행실도’를 제작해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힘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세종은 문제의 원인을 구하고 구한 끝에 백성들을 위한 쉬운 언어를 만들어야겠다는 근원적인 해법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런 태도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한 마디가 실마리가 된다.
“송사를 듣고서 결단을 내리는 일은 나 자신이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나의 관심은 송사 처결을 잘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송사를 처음부터 하지 않도록 하겠다.”
백성들의 사이의 송사를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김화의 살부殺父 사건이 위대한 한글 창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세종의 이같은 태도는 고려말 엉망진창이 돼 버린 궁중음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고전주의자였던 박연에게 먼저 중국 원래의 표준에 맞는 음악을 만들게 한 다음에 이어 우리 음악에 밝은 맹사성으로 하여금 수정 보완작업을 거치게해 당대에 어울리는 최고의 음악을 제정했다. 이처럼 고전古典 모델에 입각한 해법도출은 대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 고려사 편찬 또한 같은 맥락인데 세종 생전에는 다 완성되지 못한데서도 그 어려움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질문의 출발은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끊임없이 ‘왜 하필이면 한국 사회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 방향으로 오게 됐는가?’에 대한 냉철한 진단에 의해 점검받아야 한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연장선에서 “현재란 미래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고 싶다. 미래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는 이 말이 더 시급한 듯하다.
이한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조선일보 문화부장 출신이며
현재 논어등반학교 교장으로 논어 읽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오늘, 과거 태종과 세종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미래 모델을 구상해 본다.
미래 기획이란 진공眞空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향후 10년을 기획하려면 적어도 과거 10년을 정확히 진단해야 하고 향후 30년을 기획하려면 과거 30년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지식사회에서 미래 기획, 혹은 미래 진단의 담론이 사라졌다. 그저 그때그때 터져 나오는 이슈들에 대한 땜질식 처방을 놓고서 갑론을박을 벌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인상에 남는 미래 기획을 들자면 비록 국가 주도이기는 해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큼 넓고 깊은 영향을 남기며 현실 속에 구현된 기획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1968년 창립돼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한국미래학회의 활약이다. 대체로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라는 큰 흐름을 읽고서 연구와 저술 그리고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미래 기획이 있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0년대 들어 과거와 같은 어젠다 설정과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학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이 앓고 있는 미래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라 할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미래 지향을 잃은 과거 탐색은 자칫 맹목적이고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빠진 미래 지향은 공허하다. 미래와 과거가 지속적으로 상호 대화를 나눌 때라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살아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종과 세종의 미래 기획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리 말해 두자면 태종은 미래를 먼저 구상하고서 현재를 만들어간 유형이라면 세종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표준을 확보한 다음에 현재를 새롭게 해간 유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유형을 종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할 숙제를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태종의 경우다. 태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육조 직계제로 바꿨다. 한 마디로 재상 중심의 정치에서 국왕 중심의 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흔히 태종의 권력투쟁의 승리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표피적 관찰이다. 의정부 서사제 하에서도 태종은 충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기 개인의 정치권력만 생각했다면 이런 혁신을 굳이 위험부담을 안아가며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고려말 혼란했던 정치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강력한 왕권 중심 제도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후대를 위해 왕권 강화를 골자로 하는 육조직 계제를 관철시켰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것은 세종이다.
이처럼 미래를 먼저 구상하고서 현재를 만들어간 태종의 두 번째 결단은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을 임금으로 올린 일이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세자교체란 상당한 권력균열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황희가 양녕편에 섰다고 정치적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백성과 종묘사직의 미래를 우선시했고 그에 입각해 충녕대군을 택현擇賢하는 대결단을 내렸다. 실제로 그로 인해 세종의 태평성대가 찾아왔다.
물론 이런 미래 기획은 특출난 임금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또 그에 따른 위험성이 크다. 사실 처남들인 민씨 형제들의 죽음은 바로 이런 미래 기획의 변화와도 밀접했다. 즉 태종은 양녕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양녕과 밀접했던 외삼촌들인 민씨 형제들을 제거한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정작 양녕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민씨 형제들의 죽음은 매우 억울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충녕을 왕위에 올리고서 그의 처가 집안인 심씨 집안을 초토화시킨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미래에서 출발하는 기획은 이처럼 현재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성찰에 기반한 미래 기획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세종의 경우다.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태종과 달리 현장 경험이 없었다. 선량한 성품과 호학好學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일이 생길 때마다 세종은 “옛일을 상고하라”고 했다. 즉 예전의 비슷한 케이스들을 모아 비교 검토한 뒤에 해법을 찾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사안을 개별적으로 푸는데 만족하기보다는 늘 근본적인 해법을 추구하는 국왕이었다. 그것은 곧 과거의 표준으로 돌아가 근원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한글 창제가 그 전형이다.
세종 10년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여느 임금 같으면 그냥 강상綱常을 어긴 죄라 해 사형을 시키라고 명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달랐다. 일단 그 사건의 ‘근원적인’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자신이 정치를 잘 못해서 백성들의 풍속이 교화되지 않아 이런 사건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이에 풍속교화를 위해 ‘삼강행실’을 교육시키고 또 ‘삼강행실도’를 제작해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힘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세종은 문제의 원인을 구하고 구한 끝에 백성들을 위한 쉬운 언어를 만들어야겠다는 근원적인 해법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런 태도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한 마디가 실마리가 된다.
“송사를 듣고서 결단을 내리는 일은 나 자신이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나의 관심은 송사 처결을 잘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송사를 처음부터 하지 않도록 하겠다.”
백성들의 사이의 송사를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김화의 살부殺父 사건이 위대한 한글 창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세종의 이같은 태도는 고려말 엉망진창이 돼 버린 궁중음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고전주의자였던 박연에게 먼저 중국 원래의 표준에 맞는 음악을 만들게 한 다음에 이어 우리 음악에 밝은 맹사성으로 하여금 수정 보완작업을 거치게해 당대에 어울리는 최고의 음악을 제정했다. 이처럼 고전古典 모델에 입각한 해법도출은 대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 고려사 편찬 또한 같은 맥락인데 세종 생전에는 다 완성되지 못한데서도 그 어려움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질문의 출발은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끊임없이 ‘왜 하필이면 한국 사회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 방향으로 오게 됐는가?’에 대한 냉철한 진단에 의해 점검받아야 한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연장선에서 “현재란 미래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고 싶다. 미래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는 이 말이 더 시급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