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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전집』,『박헌영 전집』은 있어도 『이승만 전집』은 없다
역사정치에서 벗어난 인문학적 접근 필요
우상으로 만들기 앞서 공과를 공정하게 역사화하는 데 관심 가져야
1. 정치에서 역사로
이승만(1875~1965)과 박정희(1917~1979)에 대한 애증을 정치적 동원에 활용하고자 하는 역사정치는 효력을 잃고 있다. 두 인물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을 현실정치로 호명呼名하기 앞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 속으로 되돌려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재조명하고,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작업 없이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국제사회에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일천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가는 두 인물의 저작에 대한 분석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부터 드러난다. 어떤 인물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저작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 기억의 재생에만 골몰하는 기억전문가들이 그의 저작들을 통독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이미 골동품이 된 이승만의 저작들을 집대성한 『우남 이승만 전집』은 완간조차 되지 못한 상태이다.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대한민국 도서관들에 『김일성전집』,『박헌영전집』은 있어도『이승만 전집』은 없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이승만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했던 반-이승만 성향의 정권들 탓일까? 더 오래 집권했던 역대 보수정권, 이승만이 선도했던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보수하겠다는 보수우파들의 책임은 없을까?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역사정치에 동원하는 데 급급했지 차분히 그들을 연구하지 못한 것은 좌우가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이기 앞서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평가하는 고저의 문제이다.
2. 우상에서 인간으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떤 목적에서든 역사정치의 우상으로 만드는 데만 골몰하다 보면 그들의 인간적 내면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이승만 비판이나 박정희 비판은 오히려 대상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이 남긴 논설, 연설, 시, 일기, 인터뷰 등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인간 이승만, 인간 박정희의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차분히 정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우상이든 나쁜 우상이든 그들을 만든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들을 빚어낸 교육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필요하다. 정치적 찬성이나 반대의 우상화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가려지고, 또 다른 인간이 비슷한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역사적 교훈을 얻기는 어려워진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찬반 양 진영의 편향된 정치적 호명으로 인해 그들의 집권 시대에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 또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의 부분적 실종으로 이어진다. 물론 개중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다가 월북하여 평양에 묻혀 있는 최덕신 전 외무장관 같은 인물도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조명은 그들과 함께 했던 동반자들마저 그림자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을 거쳐 한국에 왔던 프란체스카 도너라는 여인의 일생은 이승만과 떼어놓고 고찰될 수 없지만, 여성학적으로나 이민학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박정희의 냉정한 측면을 감싸주었다는 식으로만 평가되곤 하는 육영수의 인물사도 독립적으로 서술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취지에도 부합할 터이다.
한국 정치학계가 미국 정치학계보다 어느 미국 민간업체가 개발한 SSCI 시스템에 매몰됨으로써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의 토대가 더 부박해지고 말았다. 정치적 인물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란 단순히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해당 인물에 내재하고 있는 선악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통한 연구, 그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연구일 것이다. 지금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역사정치에서 벗어나 그런 인문학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3. 기억과 망각의 균형
자신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우상에 대한 증오나 애착보다 더 야속한 것은 결국 모든 인간들이 서서히 잊혀진다는 것이다. 우상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중의 망각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인물은 결코 신神이 아니기에 과오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과오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망각은 치유 의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기억전문가들에 의해 오히려 조장되고 있는 기억과 망각의 불균형이다. 일반 대중에게 기억과 망각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중에게 기억과 망각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기억전문가들이 필요했고, 고대 사회에서는 제사장들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에는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기억 관련 기관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 기억전문가들이 균형성을 상실할 때,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화해를 위한 역사,’ ‘통일을 위한 역사’라는 명목으로 김일성과 마오쩌둥이라는 우상에 대한 경배는 조장하면서, 그들의 공산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워야 했던 이승만과 박정희의 과오에 대한 기억만을 부각시켜 증오의 우상으로만 만들고자 하면 대한민국 내에서 그들과 경쟁했던 인물들이 존립할 기반도 흔들리게 된다.
2014년에 발발한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들에게 기억과 망각의 균형이 지니는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세월이 흐르면 세계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도 점차 잊혀진다. 제2차 세계대전에 5천만 이상이 죽었다는 사실, 태평천국의 봉기 기간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있다. 영웅도 악한도 잊혀진다. 사실 모든 비극과 악행을 다 기억하면 어떻게 인류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을 것인가?
문제는 기억과 망각의 균형이다. 눈 앞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를 애정의 우상이나 증오의 우상으로 만들기 앞서 그들의 공과를 공정하게 역사화하는 작업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라이벌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하는 소망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김일성 전집』,『박헌영 전집』은 있어도 『이승만 전집』은 없다
역사정치에서 벗어난 인문학적 접근 필요
우상으로 만들기 앞서 공과를 공정하게 역사화하는 데 관심 가져야
1. 정치에서 역사로
이승만(1875~1965)과 박정희(1917~1979)에 대한 애증을 정치적 동원에 활용하고자 하는 역사정치는 효력을 잃고 있다. 두 인물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을 현실정치로 호명呼名하기 앞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 속으로 되돌려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재조명하고,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작업 없이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국제사회에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일천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가는 두 인물의 저작에 대한 분석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부터 드러난다. 어떤 인물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저작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 기억의 재생에만 골몰하는 기억전문가들이 그의 저작들을 통독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이미 골동품이 된 이승만의 저작들을 집대성한 『우남 이승만 전집』은 완간조차 되지 못한 상태이다.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대한민국 도서관들에 『김일성전집』,『박헌영전집』은 있어도『이승만 전집』은 없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이승만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했던 반-이승만 성향의 정권들 탓일까? 더 오래 집권했던 역대 보수정권, 이승만이 선도했던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보수하겠다는 보수우파들의 책임은 없을까?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역사정치에 동원하는 데 급급했지 차분히 그들을 연구하지 못한 것은 좌우가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이기 앞서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평가하는 고저의 문제이다.
2. 우상에서 인간으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떤 목적에서든 역사정치의 우상으로 만드는 데만 골몰하다 보면 그들의 인간적 내면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이승만 비판이나 박정희 비판은 오히려 대상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이 남긴 논설, 연설, 시, 일기, 인터뷰 등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인간 이승만, 인간 박정희의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차분히 정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우상이든 나쁜 우상이든 그들을 만든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들을 빚어낸 교육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필요하다. 정치적 찬성이나 반대의 우상화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가려지고, 또 다른 인간이 비슷한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역사적 교훈을 얻기는 어려워진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찬반 양 진영의 편향된 정치적 호명으로 인해 그들의 집권 시대에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 또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의 부분적 실종으로 이어진다. 물론 개중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다가 월북하여 평양에 묻혀 있는 최덕신 전 외무장관 같은 인물도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조명은 그들과 함께 했던 동반자들마저 그림자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을 거쳐 한국에 왔던 프란체스카 도너라는 여인의 일생은 이승만과 떼어놓고 고찰될 수 없지만, 여성학적으로나 이민학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박정희의 냉정한 측면을 감싸주었다는 식으로만 평가되곤 하는 육영수의 인물사도 독립적으로 서술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취지에도 부합할 터이다.
한국 정치학계가 미국 정치학계보다 어느 미국 민간업체가 개발한 SSCI 시스템에 매몰됨으로써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의 토대가 더 부박해지고 말았다. 정치적 인물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란 단순히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해당 인물에 내재하고 있는 선악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통한 연구, 그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연구일 것이다. 지금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역사정치에서 벗어나 그런 인문학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3. 기억과 망각의 균형
자신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우상에 대한 증오나 애착보다 더 야속한 것은 결국 모든 인간들이 서서히 잊혀진다는 것이다. 우상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중의 망각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인물은 결코 신神이 아니기에 과오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과오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망각은 치유 의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기억전문가들에 의해 오히려 조장되고 있는 기억과 망각의 불균형이다. 일반 대중에게 기억과 망각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중에게 기억과 망각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기억전문가들이 필요했고, 고대 사회에서는 제사장들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에는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기억 관련 기관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 기억전문가들이 균형성을 상실할 때,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화해를 위한 역사,’ ‘통일을 위한 역사’라는 명목으로 김일성과 마오쩌둥이라는 우상에 대한 경배는 조장하면서, 그들의 공산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워야 했던 이승만과 박정희의 과오에 대한 기억만을 부각시켜 증오의 우상으로만 만들고자 하면 대한민국 내에서 그들과 경쟁했던 인물들이 존립할 기반도 흔들리게 된다.
2014년에 발발한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들에게 기억과 망각의 균형이 지니는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세월이 흐르면 세계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도 점차 잊혀진다. 제2차 세계대전에 5천만 이상이 죽었다는 사실, 태평천국의 봉기 기간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있다. 영웅도 악한도 잊혀진다. 사실 모든 비극과 악행을 다 기억하면 어떻게 인류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을 것인가?
문제는 기억과 망각의 균형이다. 눈 앞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를 애정의 우상이나 증오의 우상으로 만들기 앞서 그들의 공과를 공정하게 역사화하는 작업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라이벌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하는 소망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