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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문명국가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대국이 곧 선진국은 아니다. 군사강국이 곧 선진국인 것도 아니다. 선진 문명국가의 궁극적인 바탕은 그 사회의 지력(知力) 수준이다. ‘아는 게 힘’이라는 불변의 진리는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무리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외쳐도, 또는 언젠가 4만 불, 혹은 5만불 시대가 된다 한들 명실상부한 지식국가(knowledge state)로 거듭나지 않으면 선진 문명국가 대열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 유통의 측면에서 보자면 작금의 ‘선진국 진입’이라는 자화자찬에도 부끄러운 측면이 많다.
교육열이 높다고 지식사회는 아니다. 대학이 많다고 지식국가인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우에 비교하여 선진국의 지식생태계가 확연히 다른 점은 영혼(spirit)과 제도(institution) 두 가지 측면에서다. 그 차이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격차를 인정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공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건국에서부터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 이르는 근대화의 역정을 유례없이 성공적으로 소화한 우리나라가 선진국형 지식국가의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아쉽다. 이러한 아쉬움이 배가(倍加)되는 것은 무릇 지속가능한 선진국이 되려면 추격형 발전전략이 아니라 창조적 발전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유일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4반세기가 되어 가지만 우리에게 선진국의 최종 입구는 여전히 멀고 마지막 문턱 또한 너무나 높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판단력의 중심을 잡아주고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합리적·이성적·과학적 지성의 부재다. 사이비 지식인이 난무하고 지식 예능인이 득세하는 분위기에서 우세를 점하기 쉬운 것은 독단과 미신이다. 무(無)교양과 비(非)지성이 활개 치는 풍조는 선동과 맹신의 더할 나위 없는 온상이다. 물론 유수(有數) 선진국이라고 해서 지식의 타락과 우민화(愚民化)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쉽게 혼탁되지 않는 ‘학문의 영역’과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학자의 세계’가 굳건히 존재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학문의 전통이 없다. 우리나라 학문이 다분히 정치지향적이고 권력추종적인 것은 한편으로 유교문화의 유산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는 일탈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일지 모른다. 이에 비해 근대 이후 서구에서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발전했다. 학문이 정치와 분리되고 사실과 가치가 구분되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근대 사회과학의 대부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절대 부족한 것은 “언젠가는 능가되고 낡아 버리는 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자 목표라는 사실을 희망하고 감수하는 정신”이다.
물론 학문이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원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학문이 통째 구도자적 금욕주의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 세상 또한 많이 변했다. 근대의 여명기와 언필칭 제4차 산업혁명시대가 똑같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는 정신적 유산의 유무(有無)는 결과적으로 매우 다른 지식생태계를 만들어낸다. 노벨상 수상자를 연달아 배출하는 나라와 희대(稀代)의 폴리페서가 속출하는 나라의 차이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영혼이 없다.
제도적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는 부실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지식인들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이나 학회, 싱크탱크 등이 제 자리와 본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언필칭 ‘SKY 대학’ 운운하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는 ‘우물 안 개구리’다. 걸핏하면 세계 10위권 국력이라 말하지만 대학의 경우 세계적 수준은커녕 아시아권에서도 내로라할 만한 명문이 거의 없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속속 외국대학으로 빠지고 거기서 세계적 학자로 입신한 이후에는 국내로 돌아올 동기와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정예 두뇌를 키우고 담을 수 있는 지식국가의 그릇이 텅 빈 것이다.
대학이란 지식의 사회적 제도화를 도모하는 다양한 모델 가운데 하나다. 서구의 경우 대학의 출발은 동료(colleague)고, 동료들의 집합이 칼리지(college)로, 다시 칼리지가 모여 대학(university)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은 외부의 개입이나 규제를 배격하는 자치공동체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그게 학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이 서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결과다. 비서구권에서 세계정상급 대학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국가나 사회가 대학을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대학은 지식인의 학문공동체라기보다 초·중·고등학교의 기계적 연장에 가깝다. 존재의 이유가 그러하기에 우리나라 대학들은 정부의 간섭이나 정치적 시류에 이리저리 쉽게 휘둘린다. 그러다 보니 폴리페서가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이는 다시 대학의 자치권과 자율권을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계기를 부여한다. ‘영혼’과 ‘제도’ 두 측면에서 우리나라 지식사회는 일대 위기다. 지금 갑자기 위기를 맞았다기보다 사실은 한번도 제대로 된 지식사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모래성 위에 사는 신세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식인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간다.
선진 문명국가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대국이 곧 선진국은 아니다. 군사강국이 곧 선진국인 것도 아니다. 선진 문명국가의 궁극적인 바탕은 그 사회의 지력(知力) 수준이다. ‘아는 게 힘’이라는 불변의 진리는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무리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외쳐도, 또는 언젠가 4만 불, 혹은 5만불 시대가 된다 한들 명실상부한 지식국가(knowledge state)로 거듭나지 않으면 선진 문명국가 대열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 유통의 측면에서 보자면 작금의 ‘선진국 진입’이라는 자화자찬에도 부끄러운 측면이 많다.
교육열이 높다고 지식사회는 아니다. 대학이 많다고 지식국가인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우에 비교하여 선진국의 지식생태계가 확연히 다른 점은 영혼(spirit)과 제도(institution) 두 가지 측면에서다. 그 차이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격차를 인정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공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건국에서부터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 이르는 근대화의 역정을 유례없이 성공적으로 소화한 우리나라가 선진국형 지식국가의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아쉽다. 이러한 아쉬움이 배가(倍加)되는 것은 무릇 지속가능한 선진국이 되려면 추격형 발전전략이 아니라 창조적 발전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유일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4반세기가 되어 가지만 우리에게 선진국의 최종 입구는 여전히 멀고 마지막 문턱 또한 너무나 높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판단력의 중심을 잡아주고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합리적·이성적·과학적 지성의 부재다. 사이비 지식인이 난무하고 지식 예능인이 득세하는 분위기에서 우세를 점하기 쉬운 것은 독단과 미신이다. 무(無)교양과 비(非)지성이 활개 치는 풍조는 선동과 맹신의 더할 나위 없는 온상이다. 물론 유수(有數) 선진국이라고 해서 지식의 타락과 우민화(愚民化)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쉽게 혼탁되지 않는 ‘학문의 영역’과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학자의 세계’가 굳건히 존재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학문의 전통이 없다. 우리나라 학문이 다분히 정치지향적이고 권력추종적인 것은 한편으로 유교문화의 유산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는 일탈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일지 모른다. 이에 비해 근대 이후 서구에서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발전했다. 학문이 정치와 분리되고 사실과 가치가 구분되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근대 사회과학의 대부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절대 부족한 것은 “언젠가는 능가되고 낡아 버리는 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자 목표라는 사실을 희망하고 감수하는 정신”이다.
물론 학문이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원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학문이 통째 구도자적 금욕주의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 세상 또한 많이 변했다. 근대의 여명기와 언필칭 제4차 산업혁명시대가 똑같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는 정신적 유산의 유무(有無)는 결과적으로 매우 다른 지식생태계를 만들어낸다. 노벨상 수상자를 연달아 배출하는 나라와 희대(稀代)의 폴리페서가 속출하는 나라의 차이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영혼이 없다.
제도적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는 부실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지식인들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이나 학회, 싱크탱크 등이 제 자리와 본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언필칭 ‘SKY 대학’ 운운하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는 ‘우물 안 개구리’다. 걸핏하면 세계 10위권 국력이라 말하지만 대학의 경우 세계적 수준은커녕 아시아권에서도 내로라할 만한 명문이 거의 없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속속 외국대학으로 빠지고 거기서 세계적 학자로 입신한 이후에는 국내로 돌아올 동기와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정예 두뇌를 키우고 담을 수 있는 지식국가의 그릇이 텅 빈 것이다.
대학이란 지식의 사회적 제도화를 도모하는 다양한 모델 가운데 하나다. 서구의 경우 대학의 출발은 동료(colleague)고, 동료들의 집합이 칼리지(college)로, 다시 칼리지가 모여 대학(university)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은 외부의 개입이나 규제를 배격하는 자치공동체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그게 학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이 서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결과다. 비서구권에서 세계정상급 대학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국가나 사회가 대학을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대학은 지식인의 학문공동체라기보다 초·중·고등학교의 기계적 연장에 가깝다. 존재의 이유가 그러하기에 우리나라 대학들은 정부의 간섭이나 정치적 시류에 이리저리 쉽게 휘둘린다. 그러다 보니 폴리페서가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이는 다시 대학의 자치권과 자율권을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계기를 부여한다. ‘영혼’과 ‘제도’ 두 측면에서 우리나라 지식사회는 일대 위기다. 지금 갑자기 위기를 맞았다기보다 사실은 한번도 제대로 된 지식사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모래성 위에 사는 신세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식인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