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tem has been added to your cart.
Should I order it along with the items in my shopping cart?
젊은이들은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은 학제,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교육과정,
수천 개의 입시 전형에 대해 발언의 기회 한번 얻지 못한 채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반란! 그들은 더 이상 표류하는 영혼들이 아니다.
이제 능동적으로 혁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수용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 참여와 사회적 발언을 통해 교육 거버넌스에 개입하는 이해당사자로 변하고 있다.
앞으로 변화하는 유스퀘이크를 주목하라!
청소년은 표류하는 영혼들이다. 잠자는 시간에도 그들은 흔들림 속에 있다. 불안과 혼돈은 청소년이 성장단계에서 마주하는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한 사회가 희망적인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리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 때, 그들의 불안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 교육의 혼란은 80%가 넘는 고교생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 높은 진학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이한 현상인데, 서구 선진국들은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모르고 마냥 높은 대학 진학률만 부러워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한국 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한 경쟁의 일그러진 교육환경이 마치 선진 모형인 것처럼 오해된 것이다. 그리고 출세지향의 사회문화가 성공적인 교육의 동인인 것처럼 예찬되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학입시와 진학은 모든 청소년과 학부모의 지상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혼란 가운데 교사, 학생, 학부모가 이해관계자로 포함되어 있다. 청소년과 기성세대가 함께 입시라는 감옥에 가두어진 형국인 것이다. 유, 초, 중, 고교로 올라가는 사다리 구조는 종점인 대학입시에 종속되어, 중등 교육의 체계적 과정을 거꾸로 흔들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온갖 편법적이고 비교육적인 현상이 야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1945년 ‘교육긴급조치’ 시대를 시작으로 1946년 ‘교수요목기’를 거쳐 2015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총 12번의 교육과정 개정이 있었다. 정부 당국은 10년을 이어가지 못하고 계속 교육과정을 뜯어고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사회 변동 속도다. 외부 환경의 변화를 교육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압력이 교육과정을 계속 누더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개정교육과정’으로 일컬어지는 현행 커리큘럼도 2025년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대학 입시는 더욱 혼란스럽다. 광복 이후 16번의 대입 제도 변화가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 당국은 사회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하지만 수요자인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잦은 변경에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을(乙)의 입장이니, 때마다 중등 교육의 이해 당사자들은 또 무슨 발표가 나올까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뒤에는 갑(甲)을 향한 분노가 이어졌다.
저마다 교육의 본질에 대한 관점은 다를 수 있겠으나,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 계발’로 집약된다. 민주화 이후 폐기된 ‘국민교육헌장’이 제시하는 교육의 지향점인 것이다. 비록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캐치 프레이즈이지만, 저마다의 소질을 채굴하여 유능자로 키우고자 하는 방향은 사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교육’이라는 모토 아래 움직이는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의 목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캐치 프레이즈를 활용하는 세력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 당국은 어떻게 일하는가? 한 번 교육 목표를 세우면 국민으로부터 제안을 받는 모양을 갖추고, 수많은 제도를 만들어 교육 행정의 틀을 구축하고, 국가 교육과정을 수립한다. 그리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채찍과 당근으로 학교들을 규율하고, 단위 학교 교직원들에게 연수를 필수로 요구한 후, 모든 성과를 계량화한다.
이제부터라도 교육 정책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해결돼야 한다.
첫째, 교육 당국과 지역 교육청의 ‘전지적 참견 시점’을 파괴하는 것이다.
교육 당국이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빙자해 수많은 제도와 법으로 사학을 옭아매 온 관행을 혁파해야 한다. 온갖 복무지침과 공문에 시달리는 학교와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겠는가? 세계적 명문 사립, 이튼(Eton College)은 교육과 행정 모두 지역교육청에서 자유롭고, 학사 및 교육과정은 전적으로 학교 자율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교육당국은 영․미의 교육이론은 그토록 숭상하면서 그들의 실천 방식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다’는 식으로 도외시한다. 이튼의 투철한 국가관과 명예를 중시하는 면학 풍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헌신과 봉사를 익히는 교육, 스포츠로 함양하는 협동정신과 조직력, 기숙시설 및 모든 공간을 교육의 인프라로 활용하는 시스템 등은 학교 자율화를 통해서만이 구현할 수 있는 혁신이다.
둘째, 대학 입시의 개선이다.
수천 개의 입시 전형이 난무하는 비정상적 시스템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격변의 시대에 어떠한 혁신도 이룰 수 없다. 교육부는 대학 입학 정원과 돈을 쥐고 학생 수의 감축은 물론 온갖 재정 지원 사업으로 거버넌스에 개입한다. 수시, 정시 비율 조정까지 교육부의 재량으로 둬서는 널뛰듯 하는 입시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수험생들이 사교육 시장을 맹신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학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대행해주는 학원에서 심리치료 효과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일그러진 현실은 교육부의 정책이 초래한 것이다. 대입 시험을 대학들이 자교의 정체성과 교육 이념에 맞게 자율적으로 주관하도록 하여, ‘깜깜이 전형’의 부정적 효과를 없애야 한다.
셋째, 중등교육 생태계는 대입 시험이라는 전쟁을 앞둔 여러 이해관계자가 첨예하게 맞서는 장(場)이다.
인공지능이 몰고 온 지능정보사회로의 급속한 진입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 원격교육’이 교육 현장의 상수가 되면서, 이제 중등 교육은 거대한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2020년부터 만18세 이상의 청소년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교사들에 의한 사상 침해에 저항하는 인헌고 사태 등은 우리로 하여금 중등교육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치개혁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도 36세의 제1야당 대표를 갖게 되었다. 청년의 반란! 이른바 유스퀘이크(Youthquake)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표류하는 영혼들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의 수용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 참여와 사회적 발언을 통해 교육 거버넌스에 개입하는 이해당사자로 변하고 있다.
인간은 향상을 꿈꾸는 존재다. 그래서 교육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어느 시대든 학교는 근본주의적 교육이념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예외 없이 교육을 자신의 정치적 이념으로 채색해 왔다. 정권과 교육의 커플링 현상을 철폐하지 않으면, 조만간 ‘유스퀘이크’의 주체들이 교육 당국을 향해 교육의 바른 정향(定向)을 긴급동의할 것이다. 어제까지 교육의 ‘피해자’였던 자들이, 정치인이 되거나 시민운동가가 되어서 ‘개혁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은 학제,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교육과정, 수천 개의 입시 전형에 대해 발언의 기회 한번 얻지 못한 채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제 능동적으로 혁신을 요구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필자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에서 많은 혜택을 받아 온 사람이지만, ‘유스퀘이크’를 주도할 그들과 함께 같은 전선(戰線)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나라’는 그들의 것이요, 그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 질 것이라 믿는다.
젊은이들은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은 학제,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교육과정,
수천 개의 입시 전형에 대해 발언의 기회 한번 얻지 못한 채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반란! 그들은 더 이상 표류하는 영혼들이 아니다.
이제 능동적으로 혁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수용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 참여와 사회적 발언을 통해 교육 거버넌스에 개입하는 이해당사자로 변하고 있다.
앞으로 변화하는 유스퀘이크를 주목하라!
청소년은 표류하는 영혼들이다. 잠자는 시간에도 그들은 흔들림 속에 있다. 불안과 혼돈은 청소년이 성장단계에서 마주하는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한 사회가 희망적인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리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 때, 그들의 불안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 교육의 혼란은 80%가 넘는 고교생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 높은 진학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이한 현상인데, 서구 선진국들은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모르고 마냥 높은 대학 진학률만 부러워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한국 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한 경쟁의 일그러진 교육환경이 마치 선진 모형인 것처럼 오해된 것이다. 그리고 출세지향의 사회문화가 성공적인 교육의 동인인 것처럼 예찬되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학입시와 진학은 모든 청소년과 학부모의 지상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혼란 가운데 교사, 학생, 학부모가 이해관계자로 포함되어 있다. 청소년과 기성세대가 함께 입시라는 감옥에 가두어진 형국인 것이다. 유, 초, 중, 고교로 올라가는 사다리 구조는 종점인 대학입시에 종속되어, 중등 교육의 체계적 과정을 거꾸로 흔들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온갖 편법적이고 비교육적인 현상이 야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1945년 ‘교육긴급조치’ 시대를 시작으로 1946년 ‘교수요목기’를 거쳐 2015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총 12번의 교육과정 개정이 있었다. 정부 당국은 10년을 이어가지 못하고 계속 교육과정을 뜯어고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사회 변동 속도다. 외부 환경의 변화를 교육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압력이 교육과정을 계속 누더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개정교육과정’으로 일컬어지는 현행 커리큘럼도 2025년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대학 입시는 더욱 혼란스럽다. 광복 이후 16번의 대입 제도 변화가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 당국은 사회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하지만 수요자인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잦은 변경에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을(乙)의 입장이니, 때마다 중등 교육의 이해 당사자들은 또 무슨 발표가 나올까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뒤에는 갑(甲)을 향한 분노가 이어졌다.
저마다 교육의 본질에 대한 관점은 다를 수 있겠으나,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 계발’로 집약된다. 민주화 이후 폐기된 ‘국민교육헌장’이 제시하는 교육의 지향점인 것이다. 비록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캐치 프레이즈이지만, 저마다의 소질을 채굴하여 유능자로 키우고자 하는 방향은 사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교육’이라는 모토 아래 움직이는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의 목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캐치 프레이즈를 활용하는 세력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 당국은 어떻게 일하는가? 한 번 교육 목표를 세우면 국민으로부터 제안을 받는 모양을 갖추고, 수많은 제도를 만들어 교육 행정의 틀을 구축하고, 국가 교육과정을 수립한다. 그리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채찍과 당근으로 학교들을 규율하고, 단위 학교 교직원들에게 연수를 필수로 요구한 후, 모든 성과를 계량화한다.
이제부터라도 교육 정책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해결돼야 한다.
첫째, 교육 당국과 지역 교육청의 ‘전지적 참견 시점’을 파괴하는 것이다.
교육 당국이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빙자해 수많은 제도와 법으로 사학을 옭아매 온 관행을 혁파해야 한다. 온갖 복무지침과 공문에 시달리는 학교와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겠는가? 세계적 명문 사립, 이튼(Eton College)은 교육과 행정 모두 지역교육청에서 자유롭고, 학사 및 교육과정은 전적으로 학교 자율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교육당국은 영․미의 교육이론은 그토록 숭상하면서 그들의 실천 방식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다’는 식으로 도외시한다. 이튼의 투철한 국가관과 명예를 중시하는 면학 풍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헌신과 봉사를 익히는 교육, 스포츠로 함양하는 협동정신과 조직력, 기숙시설 및 모든 공간을 교육의 인프라로 활용하는 시스템 등은 학교 자율화를 통해서만이 구현할 수 있는 혁신이다.
둘째, 대학 입시의 개선이다.
수천 개의 입시 전형이 난무하는 비정상적 시스템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격변의 시대에 어떠한 혁신도 이룰 수 없다. 교육부는 대학 입학 정원과 돈을 쥐고 학생 수의 감축은 물론 온갖 재정 지원 사업으로 거버넌스에 개입한다. 수시, 정시 비율 조정까지 교육부의 재량으로 둬서는 널뛰듯 하는 입시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수험생들이 사교육 시장을 맹신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학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대행해주는 학원에서 심리치료 효과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일그러진 현실은 교육부의 정책이 초래한 것이다. 대입 시험을 대학들이 자교의 정체성과 교육 이념에 맞게 자율적으로 주관하도록 하여, ‘깜깜이 전형’의 부정적 효과를 없애야 한다.
셋째, 중등교육 생태계는 대입 시험이라는 전쟁을 앞둔 여러 이해관계자가 첨예하게 맞서는 장(場)이다.
인공지능이 몰고 온 지능정보사회로의 급속한 진입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 원격교육’이 교육 현장의 상수가 되면서, 이제 중등 교육은 거대한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2020년부터 만18세 이상의 청소년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교사들에 의한 사상 침해에 저항하는 인헌고 사태 등은 우리로 하여금 중등교육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치개혁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도 36세의 제1야당 대표를 갖게 되었다. 청년의 반란! 이른바 유스퀘이크(Youthquake)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표류하는 영혼들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의 수용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 참여와 사회적 발언을 통해 교육 거버넌스에 개입하는 이해당사자로 변하고 있다.
인간은 향상을 꿈꾸는 존재다. 그래서 교육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어느 시대든 학교는 근본주의적 교육이념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예외 없이 교육을 자신의 정치적 이념으로 채색해 왔다. 정권과 교육의 커플링 현상을 철폐하지 않으면, 조만간 ‘유스퀘이크’의 주체들이 교육 당국을 향해 교육의 바른 정향(定向)을 긴급동의할 것이다. 어제까지 교육의 ‘피해자’였던 자들이, 정치인이 되거나 시민운동가가 되어서 ‘개혁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은 학제,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교육과정, 수천 개의 입시 전형에 대해 발언의 기회 한번 얻지 못한 채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제 능동적으로 혁신을 요구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필자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에서 많은 혜택을 받아 온 사람이지만, ‘유스퀘이크’를 주도할 그들과 함께 같은 전선(戰線)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나라’는 그들의 것이요, 그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 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