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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양극화, 또는 정치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비단 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보도를 해야 할 언론이 엄연한 사실에 눈감고, 건강한 의견을 가져야 할 언론이 편견에 젖어있을 때 권력은 재빨리 그 틈을 메우고 국민 위에 군림한다.
시민사회가 이리저리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고 언론이 이에 편승하는 현상은, 말하자면 우리사회의 자가면역질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면역체가 무너지면 종국에 그 언론이 속한 유기체, 즉 사회나 국가를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인 중에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이가 있다. 손이 탱탱 붓고 혈관이 점점 줄어들어 언제 절명할지 모르는 무서운 병이다. 오랜 기간 무대 소품을 제작해 온 그는 그동안 다룬 각종 화공약품과 마감 시간이 주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닐까 짐작할 뿐, 어느 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건 치료법조차 없다는 것이다. 커피나 밀가루 등을 일체 피하는 식이요법과 한방치료를 병행하며 현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조절하며 지내고 있다.
자가면역질환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오히려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이다. 면역세포들이 어느 부위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증상과 질병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면역체가 있어도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소위 ‘사이토카인 폭풍’이란 면역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 분비되어 정상 세포까지 공격해 일어나는 증상으로,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순식간에 사망에 이르게 한다.
뜬금없이 왜 자가면역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거창하게 ‘사회유기체론’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 건강과 장수가 염려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자유’라는 면역체계가 심하게 손상되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임시 유보한 개인의 자유와 그 틈새를 재빨리 채우는 국가 권력, 시민단체의 몰락과 언론의 양극화로 흉하게 일그러진 시민 사회의 모습이 그 증거들이다.
얼마 전 코로나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조치를 1단계로 낮추며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누가 누구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인지, 그 장관은 자유란 국가의 몫이며 필요할 때 적정량 떼어주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필경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자유의 개념이나 민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장관의 그런 발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크게 동요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르면 저항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언론은 그들이 감시해야 할 대상인 정치인의 상식 이하 발언에 정색하고 대들지도, 시민들의 소중한 자유를 다시 상기시켜 주지도 않았다. 국가 권력이야 원래 늘상 그래왔지만, 그걸 견제하는 건 언제나 시민의 의무였다. 그런 반작용, 혹은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 시민사회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외부에서 누르고 들어오면 그대로 찌그러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왜 뉴스에 귀를 기울일까.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를 쓴 빌 코바치Bill Kovach는 인간들이 알고자 하는 본능awareness instinct을 충족시키기 위해 저널리즘이 존재하며, 그 이유는 ‘폭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율적인 개인이 자기가 태어난 모양대로 온전히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돌려보고 검증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시민사회의 메카니즘을 가동시켰다.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면 시민 사회가 건재하고 권력자는 결코 오만에 빠질 수 없다. 우리사회는 과연 그런가?
언론의 양극화, 또는 정치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비단 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보도를 해야 할 언론이 엄연한 사실에 눈감고, 건강한 의견을 가져야 할 언론이 편견에 젖어있을 때 권력은 재빨리 그 틈을 메우고 국민 위에 군림한다. 시민사회가 이리저리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고 언론이 이에 편승하는 현상은, 말하자면 우리사회의 자가면역질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면역체가 무너지면 종국에 그 언론이 속한 유기체, 즉 사회나 국가를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안’이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중학교 역사교사가 무함마드 풍자만화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이슬람 세력에 의해 길거리에서 참수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어 프랑스 니스의 성당에서도 참수테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보다 앞서 2015년에는 이슬람 과격분자가 언론사를 난입, 17명을 사살한 ‘샤를리 에브도 사건’ 도 있었다. 프랑스를 ‘21세기 표현의 자유 최전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혁명이나 법안으로 인해 한꺼번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시대적 압력에 저항해가며 끊임없이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가치다. 피로 얼룩진 시민혁명으로 자유를 쟁취한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자유는 위협받고 있으며, 그때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함께 나서서 자유에 대한 가치를 확인한다. 샤를리 사건 때에는 ‘나도 샤를리다’는 팻말을 든 시위로 저항했고, 중학교 역사교사 장례식장에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해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다 희생된 아까운 죽음이라며 국가적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 자유는 그 자유를 찾는 절실함과 용기의 크기만큼 신장한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인 인권으로 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나, 결국 자유를 구현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용기civil courage임을 웅변 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이 일상화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은 미래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표현 욕구가 점점 강해지고 매체도 발달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전지구적인 화두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자유의 물결을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생물학자들은 멸종 위기의 동물을 이야기하고, 환경론자들은 지구온난화로부터 지구를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를 지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족해 보인다. 폭정과 비리와 억압과 불평등과 부조리,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 사실 인간 역사가 발전해온 방향을 요약하면 이렇게 단순하다. 마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가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도록 발전해온 것처럼. 우리 사회의 시민들이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튼튼한 면역력으로 정치적 부조리를 이겨내도록 하는 ‘자가면역질환’ 백신이라도 개발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언론의 양극화, 또는 정치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비단 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보도를 해야 할 언론이 엄연한 사실에 눈감고, 건강한 의견을 가져야 할 언론이 편견에 젖어있을 때 권력은 재빨리 그 틈을 메우고 국민 위에 군림한다.
시민사회가 이리저리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고 언론이 이에 편승하는 현상은, 말하자면 우리사회의 자가면역질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면역체가 무너지면 종국에 그 언론이 속한 유기체, 즉 사회나 국가를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인 중에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이가 있다. 손이 탱탱 붓고 혈관이 점점 줄어들어 언제 절명할지 모르는 무서운 병이다. 오랜 기간 무대 소품을 제작해 온 그는 그동안 다룬 각종 화공약품과 마감 시간이 주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닐까 짐작할 뿐, 어느 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건 치료법조차 없다는 것이다. 커피나 밀가루 등을 일체 피하는 식이요법과 한방치료를 병행하며 현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조절하며 지내고 있다.
자가면역질환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오히려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이다. 면역세포들이 어느 부위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증상과 질병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면역체가 있어도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소위 ‘사이토카인 폭풍’이란 면역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 분비되어 정상 세포까지 공격해 일어나는 증상으로,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순식간에 사망에 이르게 한다.
뜬금없이 왜 자가면역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거창하게 ‘사회유기체론’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 건강과 장수가 염려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자유’라는 면역체계가 심하게 손상되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임시 유보한 개인의 자유와 그 틈새를 재빨리 채우는 국가 권력, 시민단체의 몰락과 언론의 양극화로 흉하게 일그러진 시민 사회의 모습이 그 증거들이다.
얼마 전 코로나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조치를 1단계로 낮추며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누가 누구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인지, 그 장관은 자유란 국가의 몫이며 필요할 때 적정량 떼어주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필경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자유의 개념이나 민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장관의 그런 발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크게 동요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르면 저항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언론은 그들이 감시해야 할 대상인 정치인의 상식 이하 발언에 정색하고 대들지도, 시민들의 소중한 자유를 다시 상기시켜 주지도 않았다. 국가 권력이야 원래 늘상 그래왔지만, 그걸 견제하는 건 언제나 시민의 의무였다. 그런 반작용, 혹은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 시민사회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외부에서 누르고 들어오면 그대로 찌그러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왜 뉴스에 귀를 기울일까.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를 쓴 빌 코바치Bill Kovach는 인간들이 알고자 하는 본능awareness instinct을 충족시키기 위해 저널리즘이 존재하며, 그 이유는 ‘폭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율적인 개인이 자기가 태어난 모양대로 온전히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돌려보고 검증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시민사회의 메카니즘을 가동시켰다.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면 시민 사회가 건재하고 권력자는 결코 오만에 빠질 수 없다. 우리사회는 과연 그런가?
언론의 양극화, 또는 정치화가 가져오는 폐해는 비단 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보도를 해야 할 언론이 엄연한 사실에 눈감고, 건강한 의견을 가져야 할 언론이 편견에 젖어있을 때 권력은 재빨리 그 틈을 메우고 국민 위에 군림한다. 시민사회가 이리저리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고 언론이 이에 편승하는 현상은, 말하자면 우리사회의 자가면역질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면역체가 무너지면 종국에 그 언론이 속한 유기체, 즉 사회나 국가를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안’이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중학교 역사교사가 무함마드 풍자만화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이슬람 세력에 의해 길거리에서 참수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어 프랑스 니스의 성당에서도 참수테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보다 앞서 2015년에는 이슬람 과격분자가 언론사를 난입, 17명을 사살한 ‘샤를리 에브도 사건’ 도 있었다. 프랑스를 ‘21세기 표현의 자유 최전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혁명이나 법안으로 인해 한꺼번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시대적 압력에 저항해가며 끊임없이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가치다. 피로 얼룩진 시민혁명으로 자유를 쟁취한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자유는 위협받고 있으며, 그때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함께 나서서 자유에 대한 가치를 확인한다. 샤를리 사건 때에는 ‘나도 샤를리다’는 팻말을 든 시위로 저항했고, 중학교 역사교사 장례식장에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해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다 희생된 아까운 죽음이라며 국가적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 자유는 그 자유를 찾는 절실함과 용기의 크기만큼 신장한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인 인권으로 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나, 결국 자유를 구현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용기civil courage임을 웅변 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이 일상화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은 미래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표현 욕구가 점점 강해지고 매체도 발달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전지구적인 화두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자유의 물결을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생물학자들은 멸종 위기의 동물을 이야기하고, 환경론자들은 지구온난화로부터 지구를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를 지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족해 보인다. 폭정과 비리와 억압과 불평등과 부조리,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 사실 인간 역사가 발전해온 방향을 요약하면 이렇게 단순하다. 마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가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도록 발전해온 것처럼. 우리 사회의 시민들이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튼튼한 면역력으로 정치적 부조리를 이겨내도록 하는 ‘자가면역질환’ 백신이라도 개발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